퇴행정치가 경제 문화 훼손

정치는 파국으로 치닫고, 경제는 중대 위기로 가고, 국민들의 불안은 커지고 있습니다.
일 년을 열심히 살아온 스스로와 주변을 위로하면서 결실에 고마워하는 시간이 돼야 할 연말에, 온 사회가 불안감과 우울감, 열패감에 시달리고 있네요.
그나마 가끔씩 들려오는 손흥민의 환상적인 골 소식이 잠깐이지만 큰 위로가 되는군요.
우리 사회는 현재 끊임없이 위기를 조장하는 정치가 절망의 아이콘으로,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스포츠와 K-컬처가 위로의 아이콘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여러 기관에서 한국을 종합국력 6위로 건국 이래 최고로 평가하고 있는 것에 걸맞게, 스포츠와 문화에선 손흥민과 한강이 나오고 K팝이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정치는 오히려 뒤로 급발진했습니다.
경제는 선진국인데 정치는 후진국이란 오랜 평가 역시 진부한 얘기가 됐지만, 이제는 점점 더 간극이 커지는 동시에 급기야 정치가 나머지 분야까지 물귀신처럼 경쟁력을 끌어내리는 형국입니다.
정치의 본질은 공동이익 최대화, 현실은 국가경쟁력 훼손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의 본질은 뭘까요.
개인과 집단이 지닌 다양한 이해관계를, 민주적 절차를 통해 조율하고 협력해서, 가장 많은 공동의 이익을 이끌어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축구를 언급하자면, 축구는 11명의 선수가 각각의 포지션에서 긴밀하게 협력하여 골을 많이 넣어 이기는 게 목적이죠. 적극적이면서도 이타적인 협력이 없으면 득점으로 이어지기가 힘듭니다.
또한 반칙을 하면 경고나 퇴장을 당하게 되고 해당 팀은 경기를 이기기가 힘들게 됩니다.
다시 정치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우리 정치는 축구에서 골을 넣듯이 공공의 이익을 최대로 만드는 본연의 역할과는 전혀 반대로 작동해 왔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온갖 반칙으로 상대 당이 무너지도록 흔들고, 그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책까지도 발목을 잡으며, 그래서 결국 나라가 흔들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 당이 잘못해서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난도질 끝에 국가는 만신창이가 되며, 원하던 대로 만신창이 나라를 인수한 새 정권은 다시 잘해보겠다고 나서지만, 야당이 된 쪽은 "니들도 당해보라"며 똑같은 보복을 가하고, 반복적인 악순환 속에서 국가 경쟁력은 무너져 갑니다.
극단적인 정치는 국민과 언론을 양 극단으로 갈라 쳐서 더 높아진 갈등을 에너지로 삼아 준동하며, 공공의 이익을 잘 아는 사람보다는 갈등 조장꾼과 싸움꾼들을 핵심 주자로 삼아 폭주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치가 지금의 '대환장 정치'이며 그 책임의 경중은 번갈아 바뀌는 여야가 따로 따질 입장이 아닙니다.
선거 때면 선관위가 각종 미디어에다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라고 광고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전세계에서 유독 높은 한국의 투표율은 민주주의의 원활한 작동이라기보다는 병폐의 방증일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높은 정치참여는 비정상 갈등사회의 단면
세계적인 정치학자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사람들이 축구경기만큼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나치게 높은 투표율을 행사하는 사회는 갈등이 고도화된 비정상 사회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한국 정치는 과거에 매몰, 미래비전 실종
'대환장 정치'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과거에 천착하며 현재의 갈등을 키우는 데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사, 과거 정책, 과거 과오, 과거 대립에 근거해 현재 갈등을 촉발하고 격화시킵니다.
국가의 미래 비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축구 리더는 장차 골을 넣기 위해, 정치 리더는 미래의 공공이익 극대화를 위해, 현재를 가꾸고 구성원을 독려하며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과거의 잘잘못을 따지면서 구성원을 힐난하고 징벌하는 일이 리더의 주된 역할이 돼서는 절대 안됩니다.
손흥민은 주장으로서 선수들을 다독여 각자의 포지션에서 최고의 역량을 이끌어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우리의 정치 리더들은 어떤가요.
맘대로 안 된다며 경천동지할 폭거로 공공의 미래 이익을 해치는가 하면, 국가와 국민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상대 당을 헐뜯고 훼방 놓으며 국가경쟁력까지 훼손하는, 말 그대로 원칙과 상식을 무시한 정치행위를 일삼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정과 정의라는 숭고한 단어는 제 멋대로의 기준에 의해 남용되는 혐오스러운 정치용어가 됐으며,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아야 할 이른바 진실규명 혹은 진상규명이란 단어는 지긋지긋한 정치구호가 됐습니다.
훈련받지 않은 법조인의 정치 변신, 정치양극화의 한 원인
왜 이렇게 됐을까요.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정치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법조인들이 급작스럽게 정치에 뛰어들면서 생긴 현상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법조인의 정치변신은 전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며, 어떤 면에선 장점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법조인들이 적절한 변환 과정 없이 일순간에 정치에 입문하고, 또 그 비율이 전체 직업군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법은 기존 질서를 지키기 위해 과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판검사와 변호사 같은 법조인들은 그런 법에 근거해, 피해자와 가해자, 원고와 피고를 나누고 승소와 패소를 다투는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위한 합의와 조율보다는 과거 행위에 근거한 대결에 익숙할 테죠.
수많은 법조인들이 정치화의 과정 없이 일거에 의회에 들어가니, 이분법적으로 누군가를 반드시 패배시키려 하고, 그 과정에서 그들에게 익숙한 고소와 고발, 탄핵, 헌법소원이 난무한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어찌 됐든 우리 정치는 명백히 퇴행하고 있습니다.
"경제양극화가 정치양극화를 가져왔다",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등 여러 변명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의 병폐가 외국에 비해 유독 심하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이제는 정말 국민이 나서서 정치의 선동을 끊고 정치인을 채찍질할 때가 됐습니다.
문화와 스포츠, 경제 등 많은 분야에서 합리적이고 공정한 경쟁을 통해 탄생한 영웅적 한국인들이 세계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중대 국면에서 어김없이 국민 모두가 나서서 변혁을 이끌어 냈던 것처럼, 갈등을 에너지로 삼아 연명하며 끊임없이 더 큰 갈등을 조장하는 가증스러운 정치행태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 갈등과 증오지향적 리더를 배제하고, 공공의 이익에 충실할 진정한 정치 영웅을 찾는 일은 국민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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